반응형

안녕하세요!?!! 방갑습니다. 나리 입니다!!
첨으로 인사를 제대로 드리는거 같아요^^ 브끄…

제가 역사 이야기, 신화이야기, 옛날 이야기! ㅎㅎ
넘~ 나 좋아한답니다!
저처럼 이야기 좋아 하시는 분들이 봐주시는거 겠죠?! 암튼 넘!!! 나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어쩌다보니 이야기 꾼이 되어버렸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역사와 신화가 섞여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너무 흥미있고 재미있는거 같아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거번에 몰아서 만들어서 조금 피로감이 있지만 엄청 재미있답니다! 야호~!! 아이신나!
저능 보고 또 보고 있어요~내가 만들어 놓고 혼자 재밌다고 난리 난리~ ㅎㅎㅎㅎ

앞으로 독자님들이 조금 더 늘오난다면?!
피로감?!이 뭐야! 뭐야! 하면서 아주 아주 더 신나게 작업 할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역사와 신화 이야기를 다루면서 각종 이미지를 함께 만드는데 좀 힘들더라구요!?!
하지만 멋지게 예쁘게 몽환적으로! 만들다보니 넘~ 나 재미있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너무 재밌게 만들었답니다~ 꺄^^

 
아직 블로그 만든지 얼마 안되기도 했지만
아직은 방문하시는 분이 몇 안계셔서요  ㅠㅠ
그래도 찾아주시는 그 몇분들 소소한 이야기 이지만 알리고 싶은 마음에  요래요래 작은 방한켠 마련해봤습니다. 

이미지를 만들면서 어쩌다 너무 잘 뽑아진 인물들이 멋지고 예뻐서 이미지로만 남기기가 너무 아쉽더라구요
오늘 공개된 람세스2세를 예를 들어볼까해요^^
람세스 2세가 미남? 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모르죠 ㅎㅎㅎ
 
그런데 제 블로그 람세스 2세는 초초초! 초미남입니당ㅋ(지극히 개인적인;ㅋ)
인물 한 번 보시지요^^

람세스 2세 (꺅!! 오빠! 잘생기면 다 오빠 ㅎㅎㅎ)

 
 

 
위 짧디 짧은 동영상은 런웨이 AI 로 만들어봤습니다.
(무료 크레딧 150 정도 줬던거 같은데.. 진짜 조금 줌 ㅠㅠ 나중에 유료 이용해야겄어요!)


캣컷으로도 만들어봤어요^^

ㄲ ㅑ~  배경음 넣어주니 남성미 보소!! 어머어머ㅎㅎ
넘나 잘생기게 뽑아진 오빠.. 아니 남성은 요래 동영상화 해서 눈요기 같이 해볼까 해서 요래 요래 보여드리고 있습죠🤭
그리고 나름 스토리 있는 사람들이니 뭔가 마음이 가는거 같습니다^^
 
요래 재밌게 글 이미지 남기고 조만간 또 멋진 영상 만들어서 보여드릴께요~
앞으로도 관심있게 지켜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관심은 블로그를 버텨내고 만들어내는 힘!! 입니다^^
지금 이 글 읽어봐주시는 님들 넘나 감사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1. 젊은 파라오의 등장: 신의 축복을 받은 왕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3세기, 이집트 제19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로 즉위하며 역사에 등장했다. 그는 단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만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신들이 선택한 자로 여겨졌다. 그의 부왕 세티 1세는 아들 람세스를 어려서부터 군사 훈련과 정치 교육에 집중시켰고, 이는 훗날 람세스가 “파라오 중의 파라오”로 불릴 만큼 뛰어난 리더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신전과 조각상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며 그는 “살아 있는 신”으로서의 위엄을 일찍부터 세우기 시작했다.

이집트 제19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_람세스 2세

 

 

2. 카데시 전투와 영웅의 신화

람세스 2세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히타이트 제국과 벌인 카데시 전투다. 이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은 전쟁 중 하나이며,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대격돌이었다. 전투는 명확한 승자 없이 끝났지만, 람세스는 이를 자신이 승리한 전투로 선전하며 대규모 벽화와 기록을 남겼다. 전투 중 적진 한복판에서 고립되었다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역습에 성공한 일화는 그를 신이 내린 전사로 떠받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일화는 신화와 같은 전설로 재해석되어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카데시 전투

 

 

3. 위대한 건축가, 영원의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전쟁의 영웅일 뿐 아니라, 건축과 예술에서도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유산을 남긴 군주였다. 특히 아부심벨 신전은 그의 위엄과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걸작으로, 자신의 생애와 전투, 신들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조각으로 표현했다. 그는 신전, 궁전, 기념비 등 무려 수백 개의 건축물을 세우며 자신의 통치를 영원히 기록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후대의 이집트인들은 그의 이름을 거의 신화적 존재로 인식했으며, 다른 파라오들조차도 “람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해 정통성을 주장할 정도였다.

람세스 2세의 조각상

 

 

4. 인간으로 남은 신, 죽음 이후의 이야기

람세스 2세는 약 90세까지 살며 66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고대 기준으로 놀라운 장수였으며, 그의 사후에도 무덤과 미라는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과 같은 권위를 가졌던 그의 시신은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19세기 이후에야 재발견되었고, 현대에 이르러 파리에서 미라의 여권을 발급받는 희귀한 사례로 알려지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죽음 이후에도 전설로 남은 그는 단지 왕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상징으로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반응형
반응형

1. 분열된 천하를 통일한 사나이

진시황(秦始皇)은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秦)**의 황제로,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를 종식시키며 '황제'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영정(嬴政)**이며,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냉혹한 결정력으로 여섯 개의 강대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침내 천하를 하나로 묶었다.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도량형·문자·화폐를 통일했으며, 법가사상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통제를 통해 혼란을 바로잡았다. 만리장성의 축조 역시 그의 지시로 본격화되었으며, 이는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분열된 천하를 통일한 사나이 '진시황'

 

2. 불멸을 꿈꾸다 – 불로불사의 집착

진시황은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생을 마감하는 것이 두려워 전국 각지의 방사(方士)들에게 명하여 불로초를 찾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인 **서복(徐福)**은 동쪽의 바다를 건너 ‘불사의 신약’을 구하러 떠났고, 이는 훗날 일본 신화와도 연결되는 전설로 남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사의 비결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황제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수은이 포함된 약을 복용하며 오히려 건강을 해쳤다. 그의 이러한 집착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적 존재가 되고자 했던 욕망의 표현이었다.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고 있다

 

3. 죽음조차 숨긴 황제의 그림자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동순(東巡) 도중 병에 걸려 사망했다. 문제는 그의 죽음을 곧장 알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사(李斯)**와 환관 **조고(趙高)**는 혼란을 막기 위해 황제의 죽음을 은폐하고, 썩어가는 시신과 함께 수레에 생선 더미를 실어 악취를 감췄다고 전해진다. 이 비밀은 황제의 장자인 부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계획을 좌절시켰고, 결국 조고는 호해를 옹립해 조정을 장악했다. 이는 곧 진나라의 급격한 붕괴를 초래했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진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진시황 죽음의 은폐

 

4. 황제의 무덤과 사라지지 않은 권력의 상징

진시황의 무덤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병마용(兵馬俑)**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토우 군단이 그의 무덤을 지키고 있으며, 본묘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상태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무덤 내부에는 수은으로 된 강과 바다, 보석으로 장식된 별자리, 자동 석궁 장치까지 설치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이는 단지 무덤이 아니라 죽어서도 천하를 다스리고자 했던 황제의 야망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불멸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죽음 이후 펼쳐진 혼란은 절대 권력의 허무함을 일깨워준다.

병마용(兵馬俑) _ 토의군단
반응형
반응형

1. 메디아 제국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는 메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6세기 중반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메디아를 강력한 제국으로 이끌었던 키악사레스의 아들로,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메디아는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이후 중동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아스티아게스의 통치는 안정과 번영을 이어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겉보기의 평온함 뒤에는, 훗날 그를 몰락으로 이끌 예언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메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

 

2. 예언과 손자의 운명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불길한 꿈을 꿉니다. 그의 딸 만다네가 아들을 낳아 메디아 왕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언이 내려진 것이죠. 이에 그는 딸을 페르시아 귀족에게 시집보내고, 손자가 태어나자 즉시 제거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하빈(개처럼 길러지라는 의미에서)을 통해 그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페르시아 제국을 창건한 키루스 대왕입니다. 아스티아게스는 결국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고, 이 선택이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가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언을 듣고 있는 아스티아게스

 

3. 권력의 몰락과 키루스의 반란

시간이 흘러 키루스는 진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지도자로 성장하여 아스티아게스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엔 메디아가 유리했으나, 점차 키루스의 지략과 전술이 빛을 발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특히 아스티아게스의 군대 내 반란과 배신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마침내 키루스는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스티아게스를 폐위시킵니다. 메디아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페르시아가 새로운 제국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배신자들이 왕을 등지고 떠나는 전장의 혼란스러운 모습

 

4. 패배 이후의 삶과 역사적 평가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를 죽이지 않고 비교적 평온한 삶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여생을 보내며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아스티아게스를 '운명을 두려워한 왕'으로 평가합니다. 그는 권력과 안정만을 좇으며, 오히려 예언을 피하려다 그 예언을 실현하게 만든 아이러니한 인물입니다. 아스티아게스의 이야기는 고대 왕권과 운명, 그리고 세대 교체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문헌과 역사서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권좌에서 쫓겨난 노년의 왕
반응형
반응형

1. 신의 선택을 받은 왕, 사울의 등장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지나 왕정을 요구하던 시기, 사울은 신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상에 따르면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난 인물로 묘사됩니다. 백성들의 열렬한 기대 속에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르며,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초기의 그는 겸손하고, 백성들을 위하는 지도자였으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전술을 보이며 군사적 지도력도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울이 단순한 인간이 아닌, 신이 직접 세운 통치자로 여겨지게 했습니다.

신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된 '사울 왕'

 

2. 교만과 불순종, 신의 분노를 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울의 성격에는 점차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아말렉 족속과의 전투 후, 신이 명령한 전리품 파기를 무시하고 일부를 남겨둔 일입니다. 이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신에게 직접 꾸중을 받게 되며, 결정적으로 왕권을 상실하게 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신은 더 이상 사울과 함께하지 않기로 하고, 새로운 왕을 준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신에게 버림받았음을 느끼고 점점 불안과 질투에 시달리게 됩니다.

격렬한 내면의 갈등중인 사울 왕

 

3. 다윗과의 갈등, 왕의 내면이 무너지다

사울의 몰락은 단지 신의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내면에서는 점점 두려움과 불안, 질투심이 자라나게 됩니다. 특히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백성들의 인기를 얻자, 사울은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를 군사로 기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며 오랜 시간 도피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사울은 점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며, 결국에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는 금기까지 범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신의 왕이 아니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해석됩니다.

다윗의 인기를 시기하며 분노하는 사울

 

4. 전장에서의 죽음, 비극의 끝

사울의 마지막은 참혹한 전쟁터에서 마무리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의 아들 요나단을 포함한 여러 왕자들이 전사하고, 사울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자결하게 됩니다. 그의 시신은 적에게 모욕당하고, 결국 이스라엘은 큰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때 신의 선택을 받았던 왕이지만, 사울은 자신의 내면과 신과의 관계, 정치적 상황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최후는 단순한 실패를 넘어, 인간이 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약 성경의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블레셋 군과 전투 중에 부상당한 사울 왕, 전쟁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반응형
반응형

1. 붉은 전사의 탄생, 치우천황

치우천황(蚩尤)은 동이족 계열로 추정되는 전설 속 인물로, 붉은 갑옷과 무기로 중무장한 전사 집단의 수장으로 묘사된다. 그는 81명의 형제와 함께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고대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과 맞서 싸운 인물이다. 그의 모습은 일반적인 인간과는 달리 쇠로 된 이마, 청동 머리, 철제 발톱 등으로 형상화되며, ‘금속의 신’, ‘전쟁의 신’으로도 숭배받는다. 치우천황은 하늘의 질서를 거스른 반역자가 아니라, 오히려 독립성과 용맹함의 상징으로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붉은 전사 '치우천황'

 

2. 황제 헌원과의 결전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 사이의 전투는 단순한 지역 간 다툼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이 싸움은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 즈루(涿鹿) 지방에서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양 진영은 신기술과 신화를 동원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치우는 짙은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진형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헌원은 나침반의 조상 격인 ‘지남차’를 이용해 길을 찾아 승기를 잡는다. 이 전쟁은 결국 황제 헌원의 승리로 끝났고, 치우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

황제 헌원과 치우천황의 결전

 

3. 패배했지만 신이 된 전사

전쟁에서 패한 치우는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용맹함과 충성심은 전설로 남게 된다. 이후 그는 민간 신앙에서 '전쟁의 신'으로 숭배되며, 병사들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게 된다. 특히 한나라 때부터는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치우천황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조선의 무관들은 전쟁을 앞두고 치우의 깃발을 들고 출정했을 정도로 그의 위상은 신성 그 자체였다. 그가 보여준 불굴의 정신은 시대를 초월해 한민족에게 전해진다.

패배했지만 신이 된 전사 '치우천황'

 

4. 역사와 신화 사이의 영웅

치우천황은 단순한 전설 속 인물을 넘어 역사적 존재처럼 여겨져 왔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고려시대의 무기 장식, 그리고 현대의 민족주의 담론 속에서도 여전히 그의 이름은 살아 있다. 그는 비록 싸움에서 패했지만, 신화 속 황제 헌원과 맞서 싸운 유일한 존재로, ‘패배한 승자’로 남아 있다. 현대에 와서도 그의 전설은 정치적·문화적 상징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며, 특히 동북아 고대사와 민족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붉은 기운에 둘러싸인 전쟁의 신 '치우천황'
반응형
반응형

1. 영원한 왕, 길가메시의 탄생

길가메시는 기원전 2700년경 수메르 도시국가 우루크(Uruk)의 실존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전설 속 신적인 존재로 신격화되었습니다. 그는 인간과 신의 혼혈로,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이라는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뛰어난 지혜와 힘을 가진 그는 도시를 발전시켰고, 우루크 성벽을 쌓는 등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너무 강력했던 그는 자만에 빠져 폭군으로 변했고, 신들은 그를 제어하기 위해 야생의 인간 엔키두를 창조합니다. 이 만남은 길가메시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죠.

위엄 있는 젊은 길가메시

 

2. 운명을 함께한 친구, 엔키두의 죽음

길가메시는 엔키두와 함께 위험한 모험을 떠나며 우정을 쌓습니다. 그들은 삼림의 수호신 훔바바를 무찌르고, 하늘의 황소도 물리칩니다. 그러나 신들은 이 도전이 신성 모독이라 여겨 벌을 내리고, 결국 엔키두는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엔키두의 죽음은 길가메시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며, 그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개념을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됩니다. 무적이라 여겼던 동료의 죽음을 지켜본 길가메시는 불멸에 대한 공포와 집착에 사로잡히게 되죠.

엔키두의 죽음에 울부짖는 길가메시

 

3. 불멸을 향한 여정, 그리고 실패

엔키두의 죽음 이후, 길가메시는 죽음을 초월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그는 대홍수의 생존자인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 불멸의 비밀을 묻고, 결국 불사의 약초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길고 고된 여정 끝에 손에 넣은 그 약초는, 잠든 사이 뱀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이 사건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의 영역인 불멸에 도달할 수 없다는 상징적 교훈을 담고 있으며, 길가메시는 결국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잠든사이 뱀에게 약초를 빼앗기고만 길가메시

 
 

4. 죽음을 넘어선 유산

불멸에는 실패했지만, 길가메시는 그 자신이 쌓은 도시와 성벽, 그리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해 영원한 이름을 남깁니다. 그의 이야기는 세계 최초의 서사시로 기록되어 현존하며,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 존재의 본질과 죽음, 우정, 권력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신화 속 길가메시의 비극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됨의 자각과 성장으로 읽히며, 현대에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노년의 길가메시
반응형
반응형

1. 피라미드, 하늘로 향한 신성한 계단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건축물,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이 거대한 석조 구조물은 파라오가 죽은 후 태양신 라(Ra)와 합일하여 신이 되기 위한 하늘의 계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가장 유명한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는 쿠푸 왕을 위한 것이며, 그 정교한 구조와 천문학적 배치는 당시 이집트인들의 우주관과 신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냅니다. 특히 피라미드의 정렬은 오리온자리와 일치하게 설계되어, 사후 세계와 별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암시합니다. 이는 이집트 건축이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 영적, 종교적 상징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석양 속에 우뚝 솟은 기자의 대피라미드

 

2. 카르나크 신전, 신들과의 계약의 장소

룩소르에 위치한 카르나크 신전은 아문(Amun) 신을 중심으로 한 복합 신전군으로, 약 2,000년에 걸쳐 확장된 유례없는 규모의 종교 건축입니다. 이곳은 파라오가 신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신성과 권력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거대한 기둥들과 비석, 세밀하게 새겨진 부조들은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신화적 서사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기록물이기도 합니다. 신전은 단순한 예배처가 아닌 ‘하늘과 지상의 문’으로, 제사장과 파라오가 신과 교감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거대한 신성 무대였습니다.

이집트 제사장이 기도하는 장면

 

3. 오벨리스크, 태양의 불꽃을 담은 기념비

고대 이집트 거리와 신전 앞에 우뚝 솟은 오벨리스크는 태양신 라를 상징하는 신성한 기념물이었습니다. 끝이 뾰족한 이 돌기둥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세워졌으며, 그 꼭대기에는 태양빛을 반사하는 금이나 전기(전자합금)가 덮여 있었죠. 오벨리스크는 권위와 신성함의 상징이자, 신과 인간이 맺은 영원한 약속의 형태였습니다. 파라오는 이 오벨리스크에 자신의 업적과 신에 대한 충성을 새겼으며, 이는 죽은 후 신으로 승격되는 의식적 단계로 여겨졌습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오벨리스크

 

4. 건축 속에 담긴 영원의 철학

고대 이집트인에게 건축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신화와 믿음을 물질화하는 형태의 신앙이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석조 건축은 인간의 유한성과 신의 영원성을 대비시키며, ‘불멸’이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습니다. 이집트의 건축물은 죽음을 넘어선 삶, 신과의 교감, 인간 존재의 영적 완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피라미드나 신전, 오벨리스크를 마주할 때 우리는 단지 고대 유산이 아닌, 인간과 신의 관계를 정의하려 했던 거대한 이야기를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영원을 상징하는 피라미드 와 오벨리스크, 신전

반응형
반응형

1.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아테나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여신 중 하나로, 지혜와 전쟁, 도시의 수호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갑옷을 입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로 유명한데, 이는 신성한 통찰력과 전략적 사고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아테나는 아테네 도시의 수호신이자 남성 중심 사회에서도 여성의 강인함을 대변하는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녀는 힘보다 지혜로 전쟁을 이끄는 지도자였고, 여성도 사려 깊은 전략가가 될 수 있다는 고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_아테나

 

2. 사랑과 아름다움 너머의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는 단순히 아름다움과 사랑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사회적 권력과 인간 관계를 조정하는 능력도 지닌 존재였습니다. 신화 속에서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매력을 통해 신들과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곤 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부드러운 외면 뒤에 숨겨진 영향력과 감정의 통치력을 상징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이었지만, 아프로디테의 이미지를 통해 감정과 매력을 정치적 도구로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프로디테

 

3. 여신과 닮은 역사 속 여성들

신화에서처럼 역사 속 여성들도 그들의 카리스마와 지혜로 권력을 쥐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케도니아의 왕비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로, 신의 혈통을 주장하며 아들의 왕권을 뒷받침했습니다. 또, 아르테미스와 같은 사냥의 여신 이미지는 스파르타 여성들의 강인한 전사적 기질과 닮아 있습니다. 신화는 현실의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틀을 제공했고, 여성 지도자들은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역사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여신과 닮은 역사 속 여성들

 

4. 신화를 잇는 현대의 여성 리더십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며 여성 리더십의 상징으로 활용됩니다. 지혜로운 아테나, 자유로운 아르테미스, 강렬한 헤라와 같은 여신들은 현대 여성 정치인, CEO, 학자들의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과거의 여성 지도자들은 신화적 상징을 등에 업고 현실의 권력을 실현했고, 현대 여성들은 그들의 유산을 이어받아 새롭게 변주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화 속 여신들은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여성의 힘과 자존감을 상징하는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성 리더가 회의실 앞에서 강연하는 모습

반응형
반응형

1. 파라오, 신의 아들로 태어나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닌,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태양신 ‘라(Ra)’의 아들이며, 신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왕의 즉위식은 단지 정치적 절차가 아니라 신의 권능을 세상에 계승하는 의식이었고, 이는 왕이 죽어서도 오시리스의 역할을 하며 내세를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파라오의 혈통은 단순한 인간의 피가 아니라, 신의 피와 연결되어 있다는 신념이 이집트 사회 전반을 지배했습니다.

신성한 존재 _신의 아들(파라오)

 

2. 신화로 연결된 왕가의 계보

이집트 신화에는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호루스 등 신들의 가계도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신이 아니라, 실제 왕의 계보를 정당화하는 신화적 인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시리스는 죽음 이후 저승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호루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통해 왕좌를 되찾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파라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으로,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호루스의 현신’이라 불리며 신화의 반복을 연출했습니다. 이집트 왕조는 이러한 신화의 틀 속에서 통치를 신성화했습니다.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호루스의 신화적 가족 구성

 

3. 왕비와 여신의 일체성

이집트의 왕비들 역시 단순한 부군의 배우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종종 여신 하토르(Hathor)나 이시스(Isis)의 화신으로 여겨졌고, 신성한 왕권을 강화하는 존재였습니다. 특히 네페르티티와 같은 위대한 왕비들은 신전에 함께 새겨지며 신과 동일한 지위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왕과 왕비는 각각 남신과 여신의 역할을 맡아, 신의 결합을 인간 세상에서 재현한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이는 혈통 그 자체가 곧 우주의 질서와 맞닿아 있다는 이집트인들의 사유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이집트의 왕비

 

4. 신화가 남긴 유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인간 이상의 존재로 기억됩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투탕카멘, 람세스 2세,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이름을 신화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믿었던 이유는 단지 종교적 믿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신화는 삶의 모든 영역을 설명하는 도구였고, 왕권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이었습니다. 파라오의 신성한 혈통은 결국 고대 이집트의 문화와 사상이 어떤 방식으로 질서와 권위를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