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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유럽의 흑사병, 도시를 집어삼키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덮친 흑사병(페스트)은 당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앗아갔다. 단순한 전염병 그 이상으로, 흑사병은 사람들의 일상과 도시의 기능 자체를 마비시켰다. 한때 번성하던 마을과 소도시는 순식간에 주민을 잃고, 방치된 채 숲과 들판으로 사라졌다. 일부 도시들은 병사들의 시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대량으로 묻거나 불태웠고, 이후 이 지역은 ‘저주받은 땅’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이처럼 흑사병은 단순한 유행병이 아닌, 도시의 소멸을 불러온 문명 재난이었다.

흑사병으로 버려진  ‘저주받은 땅’

 

 

2. 역사에서 잊힌 유령 도시들

잉글랜드 북부의 ‘워든 로우(Wardon Law)’는 한때 작은 상업 중심지였지만, 14세기 중반 흑사병 이후 인구가 급감하며 곧 폐허가 되었다. 이처럼 전염병의 영향을 받은 도시는 지도에서 사라지거나 ‘사라진 마을(lost village)’로 기록되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사한 유령 도시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완전히 자연에 묻혀버렸다. 고고학자들은 위성 지도와 발굴을 통해 일부 도시의 유적을 확인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3. 도시 붕괴 뒤의 경제와 사회 변화

도시의 붕괴는 단지 공간의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노동력의 급감으로 인해 농노와 하층민의 가치는 급상승했고, 장원제 중심의 봉건 체제가 흔들렸다. 많은 영주는 영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몰락했으며, 남아있는 사람들은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며 도시 이주가 증가했다. 이는 중세 말기 유럽의 구조적 변화, 즉 자본주의 초기 형태와 도시 중심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염병은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변화를 이끈 기폭제이기도 했다.

 

 

4. 지금도 남아있는 흔적들

오늘날 유럽의 숲과 평야 곳곳에는 사라진 도시의 흔적이 조용히 남아 있다. 일부는 교회 터, 우물, 석조 잔해로 남아있고, 다른 일부는 이름 없는 언덕 아래 묻혀 있다. 관광 명소가 되지 않아 주목받지 못하지만, 흑사병이 남긴 이 ‘유령 도시’들은 역사와 인간의 생존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전염병은 도시를 사라지게 했지만, 그 도시는 지금도 조용히 우리의 기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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