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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면한 왕의 등장, 그러나 시대는 달랐다

1774년,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조용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왕좌에 올랐다. 그는 조부 루이 15세의 방탕한 이미지와는 달리, 절제된 생활과 백성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자세로 초기에는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네케르와 티르구 등의 개혁적인 재무장관을 등용하며 진정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우유부단하고 결정력이 부족했던 루이는 귀족들과의 갈등 앞에서 항상 한발 물러섰고, 이는 점차 백성들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1774년, 왕좌에 오른 프랑스 왕 루이 16세

 

 

2. 위태로운 왕권과 점점 타오르는 민심

프랑스의 국고는 미국 독립 전쟁 지원과 왕실의 사치로 인해 바닥이 났고, 극심한 세금 부담은 오직 평민에게만 집중되었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면세 특권을 고수하며 루이 16세의 개혁을 무력화시켰다. 결국 그는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제3신분(평민)의 반발로 인해 '국민의회'가 결성되고 헌법 제정이 요구된다. 이때부터 민중은 더 이상 왕을 존엄한 존재로 보지 않았고, 혁명의 불씨가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가 난 시민들

 

 

3. 탈출 시도와 재판, 국민의 심판대에 서다

루이 16세는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왕권 회복을 꿈꾸며 오스트리아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바렌에서 체포되어 다시 파리로 끌려온다. 이 사건은 국민에게 "왕은 더 이상 프랑스의 지도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의 입지는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결국 1792년 9월, 프랑스는 공화정을 선언하고 왕정이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이듬해 루이 16세는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국민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루이 16세가 마차 안에서 붙잡히는 순간

 

 

4. 한 시대의 끝, 그가 남긴 것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나는 결백하다. 신이여, 이 백성을 용서하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왕의 몰락을 넘어 절대왕정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왕의 피로 적신 혁명은 이후 수많은 이들의 피를 요구했고,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제국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격변의 문을 열었다. 루이 16세는 역사의 무대에서 비극적으로 퇴장했지만, 그의 실패는 프랑스 민주주의의 탄생이라는 커다란 유산으로 남았다.

단두대 앞에 선 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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