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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력한 왕권과 매력적인 청년 군주

헨리 8세는 1491년에 태어나 1509년, 18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초기의 그는 학문과 음악, 스포츠에도 능한 전형적인 르네상스 군주였다. 첫 번째 아내 캐서린과의 결혼은 형의 미망인이라는 점에서 복잡했지만, 교황의 승인을 얻어 성사되었다. 헨리는 초기 통치에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튜더 왕조의 안정에 힘썼다. 그러나 곧 왕위 계승 문제와 개인적인 욕망이 그의 정치와 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헨리 8세

 

 

 

2. 교황과의 결별, 종교개혁의 시작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한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절했고, 헨리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그는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며, 교황과 결별하고 국왕 중심의 교회를 세웠다.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해 잉글랜드 국교회를 창설하고, 수도원 해산과 교회 재산 몰수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단지 사랑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잉글랜드 종교 지형을 뒤흔든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국왕 중심의 종교개혁을 선언하는 헨리 8세

 

 

 

3. 여섯 아내와 피비린내 나는 궁정

헨리 8세의 사생활은 그 자체로 영국 왕실의 드라마다. 그는 총 여섯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 두 명은 참수되었다.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고, 간통 혐의로 처형되었다. 세 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는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를 낳고 산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헨리는 이후에도 아내들을 교체하며 권력과 계승에 집착했다. 그가 세운 왕실의 사생활은 수많은 비극과 암투를 낳았고, 당시 궁정은 공포와 불신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참수당하는 아내들

 

 

4. 쇠약한 최후와 복잡한 유산

말년에 헨리 8세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비만과 부상으로 거동도 힘든 상태였다. 1547년 사망 당시 그는 외형적으로는 강력한 군주였으나, 그가 남긴 정치적·종교적 유산은 복잡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에드워드는 개신교를 강화했고, 딸 메리는 가톨릭을 부활시키며 종교적 혼란을 심화시켰다.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 1세가 헨리의 딸로서 잉글랜드를 안정시켰고,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영국 국교회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잔혹함과 결단력을 동시에 지닌 군주로, 영국 역사의 한복판에 깊이 각인된 인물이다.

비만에 병든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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