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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화정의 아들, 브루투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키케로와 교류하며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고, 고귀한 이상을 품은 인물로 평가된다. 브루투스의 가문은 오래전부터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수호해온 귀족 가문으로, 그의 정체성과 신념은 "로마는 왕이 아닌 법으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명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원로원의 권위와 로마 시민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는 훗날 내리는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로마 공화정의 열렬한 지지자 브루투스

 

 

2. 카이사르, 혁신가인가 독재자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를 세계 제국으로 이끈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갈리아 전쟁을 통해 엄청난 군사적 성과를 거둔 그는,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로마의 절대적인 권력자로 등극한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점점 공화정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향했고, 결국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왕정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근대화하고 제국으로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브루투스와 같은 전통주의자들에겐 ‘폭군’으로 비쳤다.

갈리아 전쟁 후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전차를 탄 카이사르

 

 

3. “브루투스, 너마저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른바 '이디스의 날(Ides of March)'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다가 동료 원로원 의원들의 칼에 찔려 생을 마감한다. 그 중심에는 브루투스가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개인적으로 깊은 유대감을 나눴지만, 로마 공화정이라는 이상을 위해 배신을 선택했다. 카이사르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e?)”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신의 상징으로 남았고, 이 장면은 수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의 영감을 주었다.

브루투스의 배신

 

 

4. 이상주의자의 몰락과 로마의 운명

카이사르 암살 후 브루투스는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후일 아우구스투스)와의 내전에 휘말렸고, 결국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한다. 그는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인물을 제거했지만, 역사는 그를 배신자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루투스의 결단은 로마를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리지 못했고, 오히려 제정으로의 전환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주의자 브루투스의 비극은, 역사의 굴곡과 인간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브루투스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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